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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ntropy

불운을 타고난 행운아

01.

불운과 행운의 사랑을 동시에 받는 비범한 인간. 열일곱 살 학생 신분으로 대한민국 국적의 고등학생이다. 161cm의 키에 정상 수치의 몸무게를 가졌다. 생일은 존재했으나 잊어버린 지 오래. 천공섬의 대행자이자 세계의 변수. ​

 

02.

어깨를 스치는 검은 중단발에 앞머리는 시스루뱅으로 내렸다. 원체 태어나길 반곱슬이라 따로 손질하지 않아도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게 구불거린다. 꾸미지 않았음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인상은 그녀가 지닌 담백한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눈꼬리가 내려가 있어 토끼나 강아지처럼 순한 인상을 준다. 오죽하면 길거리의 전단지 아르바이트생에게 몇 번이나 붙잡힐 정도. 본래 눈동자 두 개가 전부 검은색이었으나, 선택자가 된 이후 오른쪽 눈이 푸르게 변했다. 동공마저 눈송이 모양으로 변해 거울을 마주할 때마다 스스로도 이질감을 느낀다고. 여담으로 어두운 공간에서도 새파란 빛을 잃지 않고 선명하다고 한다. 오른쪽 팔에는 구불거리듯 피어오르는 푸른 장미 문양의 타투가 새겨져 있다. 본인이 선택해 새긴 것은 아니고 어느새부터인가 생겨난 것이라, 세계 간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증표로 보고 있다. ​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는 편이다. 어릴 적 사이가 좋지 않던 남자아이를 폭행하는 등 순간의 감정에 휘둘려 행동하는 일이 잦았고, 그로 인해 스스로에게 실망하거나 스트레스를 받는 일도 많았다. 이런 성격을 누르기 위해 검도를 배우기 시작했고, 반복되는 동작과 호흡 속에서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익혔다. 물론 완전히 바뀌지는 않았지만, 이전보다 훨씬 침착하고 차분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스트레스가 쌓인다고 느끼기 때문에, 무언가를 깊게 고민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머리로 계산하기보다는 일단 몸을 움직이고, 시도해 본 뒤에 결과를 받아들이는 편. 맡은 일에 대한 책임감은 분명하지만, 보상이나 인정욕구 때문은 아니다. 기쁘면 웃고, 화가 나면 표정이 굳는 등 포커페이스를 못 하고 감정이 겉으로 드러난다. 부정적인 감정을 마음속에 쌓아두기보다 흘려내려버리는 편. 이유 없는 적의를 받아온 경험이 많아, 이해하려 들기보다는 일단 받아들이는 데에 익숙하다. 질서 있는 것을 좋아하고, 복잡하게 머리를 쓰는 일보다는 반복되는 노동 속에서 안정을 느낀다. 이 태도 덕에 쉽게 지쳐버리거나 번아웃에 빠지진 않지만, 동시에 자신의 궁극적 목표와 이상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심을 품는다. ​

 

천공섬의 대행자로 선택된 이후, 돔 세계 사이를 유랑하며 살아남는 과정에서 수차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고 움직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몸으로 배우는 과정에서 성격이 점차 날카로워졌다. 인외들의 사냥감이 되어 쫓기고, 믿었던 이에게서 배신을 겪으며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되었고, 야생에 가까운 상태로 변해갔다. ​

 

03.

ENTROPY, 정의할 수 없는 변수. ​

 

고하늘의 몸은 일반 생명체의 구조와 다르게 확정되지 않은 상태로 존재한다. 이로 인해 타격을 받아도 피해가 온전히 성립하지 않거나, 치명상이 발생했음에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멀쩡히 움직이는 현상이 발생한다. 이는 회복 능력이라기보다는, 손상 자체가 판정되지 않은 구조적 특성에 가깝다. 그 결과 체력 고갈 속도가 극도로 느리고, 장시간 전투에서도 쉽게 지치지 않는다. 장기전에 압도적으로 유리하다는 뜻이다. ​

 

무질서도(無秩序刀) ; 이름 없는 미로에서 획득한 아티팩트로, 규칙을 거부하는 무기로 분류된다. 유리처럼 투명한 날이 특징인 장검이며, 사용 시 검신 전체가 짙은 푸른색으로 물든다. 자루는 검은색과 짙은 푸른색이 섞인 무광 소재로 이루어져 있고, 장식은 거의 없으나 중심부에는 미세한 장미 문양이 새겨져 있다. 검집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육안으로는 확인되지 않으며, 검이 스스로 공간을 접어 집어넣는 구조로 추정되어 외부에서 보면 허공에서 검이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물리적 방어나 마법을 단순히 뚫는 것이 아니라 개념적으로 무효화시킨다. 검은 휘두르는 순간 일정 반경의 공간은 왜곡되며, 그 안에서는 계산된 인과율과 규칙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명중률, 방어, 마법 공식 등이 어긋나며, 엄청나게 혼란스러워진다. 성능만 놓고 보면 괴물에 가까운 사기급 무기이지만, 동시에 사용 난이도 또한 극단적으로 높다. ​

무질서도는 고하늘의 감정 상태에 직접적으로 반응한다. 사용자의 감정이 무너질수록 검신의 푸른빛은 짙어지고 공격력 또한 증가하지만, 그만큼 공간 왜곡도 거칠어져 사용자를 위험에 빠뜨릴 가능성이 커진다. 또한 사용자가 사망에 이를 위기에 처했을 경우, 무질서도는 일시적으로 분해되어 개념화되며 주변 공격과 판정을 흐트러뜨린다. 이 현상은 사용자를 보호하는 최후의 장치에 해당하지만, 이후 검이 재구성되기까지는 상당히 긴 시간이 필요하다. 사용자가 사망 위기일 때 무질서도가 일시적으로 분해되어 개념화되어 공격을 흩뜨리고 판정을 흐린다. 이후 재구성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다. 장기전에 유리한 특성상 피해를 최소화하며 유효타를 누적시키는 전투 방식을 선호한다. 다만 초기에는 정신적 부담을 견디지 못해 몇 차례 휘두른 뒤 패닉 상태에 빠지는 등, 검의 잠재력을 제대로 끌어내지 못했다. ​

 

눈(ob) ; 통칭 얼음의 눈. 눈은 사용자의 마력 회로와 영혼을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어, 단순한 마력 증폭이 아닌 개인의 잠재된 개념 능력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마력의 양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냉기·얼음·정지·감속·정적 에너지와 같은 개념을 다루는 권능 자체가 강화된다. 이로 인해 감각, 판단력, 인지 능력 또한 비약적으로 향상된다. 이 눈을 통해 고하늘은 주변의 시간 흐름을 느리게 인식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상대의 움직임을 극도로 정밀하게 예측할 수 있다. 극한 상황에서는 주변 온도를 순간적으로 절대영도에 가깝게 떨어뜨려, 내부 에너지를 0으로 만들 수 있다. 다만 이 능력은 고하늘 본인에게도 큰 부담을 주며, 사용 후에는 일시적으로 심각한 탈진 상태에 빠진다.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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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부모 가정으로 어머니 없이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다. 동네에서 작은 검도 학원을 운영하는 아버지는 성실했지만 늘 바빴고, 여유가 없었다. 집안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고, 생활은 언제나 빠듯했다. 아버지는 검도를 가르치는 사람답게 규율과 근성을 중시했지만, 정작 감정을 다루는 법에는 서툴렀다. 하늘에게 옳고 그름을 차분히 설명해 주기보다는, 세심하지 못해 일이 터진 뒤에야 크게 화를 내는 경우가 많았다. 하늘 역시 그 영향을 그대로 받아 자라났다. ​ 그녀는 감정이 앞서는 아이였다. 유년기, 사이가 좋지 않던 남자아이에게 순간적으로 손이 나가 대판 싸우게 되었는데, 따로 싸움을 배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공격해 상해를 입힌 적이 있었다. 사건은 진심어린 사과와 치료비 대납으로 무마되었지만 하늘은 그날 아버지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 하늘은 자기 자신을 무섭게 느끼기 시작했다. 화가 나면 통제하지 못하고 행동해 버린다는 사실이, 아버지를 실망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자꾸만 목을 졸랐다. 화를 내지 않기 위해 애썼고, 애쓰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스트레스로 돌아오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하늘은 점점 스스로를 눌러 담는 쪽을 택했다. 하지만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억눌린 감정은 방향을 찾지 못한 채 방황했고, 그 압박은 결국 또 다른 탈출구를 요구했다. ​
그때 하늘이 붙잡은 것이 검도였다. 누군가의 강요도, 특별한 동기도 아니었다. 검도의 반복되는 동작과 일정한 호흡, 정해진 예법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잠시나마 잠재워 주었다. 검을 휘두를 때만큼은 생각이 단순해졌고, 감정에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검도는 그녀에게 감정이 폭주하지 않도록 몸을 고정하는 틀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이 선택은 역설적으로 하늘을 더 독특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감정을 통제하려는 노력은 곧 감정을 완전히 지우지 못한 채, 표면만 다듬을 뿐이었다. 하늘은 겉으로는 차분해졌지만, 내면에서는 언제나 불안을 안고 있었다. 분노, 두려움, 외로움 같은 감정은 억제될 뿐 사라지지 않았다. 고하늘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려 애쓰는 동시에, 감정을 완전히 부정하지도 못하는 아이로 성장했다. ​

그녀에게 학교는 또 다른 문제였다. 예전에 싸웠다는 소문. 상대를 집요하게 몰아붙였다는 이야기는 진실와 거짓이 적절히 섞인 채, 하늘을 설명하는 하나의 문장이 되어 있었다. 고하늘은 그 시선을 견디지 못했다. 본인이 해명해도 믿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꾹꾹 차오르는 분노는 막을 수 없었다. 이미 도화선에는 붙이 붙었다. 하늘은 그동안 눌러두었던 감정들을 거칠게 쏟아냈고, 소리지르는 그녀의 목소리를 제외하곤 교실은 적막해졌다. 누구도 그녀를 말리지 않았고, 누구도 그녀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대신 서로 눈을 마주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역시 그렇다, 소문이 맞다는 낙인들. 소문이 말하는 고하늘의 모습이 그들 앞에 있었다. ​ 하늘은 그 이후 아이들 사이에서 점점 고립되었다. 괜히 엮이기 싫다는 말, 성격이 이상하다는 말들이 그녀를 고립시켰다. 문제는 그것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직접적인 폭력이나 노골적인 괴롭힘보다는 조별 활동에서 은근히 배제되거나, 이미 짜인 무리 속에 끼워주지 않는 식의 은근한 따돌림이 이어졌다. 누군가를 때린 것도, 욕설을 들은 것도 아니었기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기가 어려웠다. 몇몇은 주워들은 말로 뒷담화를 하기 일쑤였고, 그 날선 말들은 언제나 하늘의 귓가까지 닿았다. 그녀는 주동자들을 미워하기보다는 체념을 택했다. 나는 폭력적인가? 위험한 존재인가? 아니면 단지 순간을 통제하지 못했을 뿐이었을까. 고하늘은 스스로도 본인을 확정할 수 없었다. 성격은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웃는 일이 줄었고, 말수도 줄었다. 그저 눈에 띄지 않고 하루를 넘기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자신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이 환경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으나 그 깨달음은 곧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집안 사정상 전학은 불가능했고, 이런 현실을 잊기 위한 유일한 방안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운동인 검도뿐이었다. 그날을 기점으로 하늘은 검도 선수를 준비하게 된다. 몸을 혹사시키는 훈련 속에서 생각을 비울 수 있었고, 반복되는 동작과 호흡 속에서는 주변의 시선도, 쌓인 말들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검도 대회에 몇 차례 출전했고, 크고 작은 상도 받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순조로워 보였고, 주변에서는 재능이 있다는는 말도 들려왔으나.. 고하늘 본인은 알고 있었다. 자신은 재능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무리 훈련해도, 프로의 벽을 넘을 수 없다는 사실을. 지금 내가 검도를 하는 이유는 단순한 객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자각은 더 깊은 우울로 이어졌다. 목표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여전히 바뀌지 않은 현실과 돌아갈 수 없는 일상이었다. 검도조차 더 이상 도피의 수단이 될 수 없자, 그녀는 또 다른 방식의 도피를 선택했다. ​

그 도피처는 예상보다 가까운 곳에서 찾아내게 되었다. 바로 꿈 속이었다. 하늘은 어릴 때부터 꿈을 꾸는 것을 좋아했다. 어린 시절에는 꿈속에서 상상 속 세계를 누볐지만, 성장한 뒤의 꿈은 지극히 평범했다. 학교에 가고, 친구와 대화하고, 아무도 자신을 피하지 않는 일상. 그저 그뿐이면 충분했다. 꿈속에서는 누구도 하늘을 배제하지 않았고, 아무 이유 없이 외톨이가 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같은 꿈을 꾸기 시작한 지 한 달쯤 지났을 때, 고하늘은 기시감을 느꼈다. 이 꿈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는 것. 꿈속 공간에 아주 미세한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친구의 손에 금이 가더니 부서지고, 그 안이 도자기처럼 텅 비어 있는 장면을 보았다. 동물들은 점점 형태를 잃고, 괴생명체처럼 일그러진 모습으로 변해 갔다. 익숙했던 세계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꿈은 버릴 수 없었다. 그곳은 여전히 현실보다 안전했고, 따뜻했기 때문에. 균열이 커질수록 그녀는 꿈속을 더 오래 붙잡고 있었고, 그 집착이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넘었다. ​

그리고 그날, 고하늘은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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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뜬 곳은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길바닥에 쓰러져있던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요새 무리해서 하교 중에 잠깐 졸았나 싶었다.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하늘은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건물의 형태도, 도로의 배치도, 간판에 적힌 문자까지 어딘가에서 본 것 같았다. 검도 학원이 있을 법한 큰길을 따라가 보고, 예전에 자주 지나던 골목과 비슷한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아는 얼굴이 보일까 창문 너머로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었다. 이곳이 현실이라면, 자신이 알고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했었다. 하지만 아는 얼굴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 역시 이상했다. 인조적인 살가죽을 덮어쓴 듯한 얼굴, 초점을 잃은 동공. 인간같지 않은 인간들과 마주치자 패닉에 빠진 그녀는 그대로 뒤를 돌아 도망치기 시작한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뿐이라고, 내가 가야 할 곳이 따로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세뇌하듯 되뇌었다. 조금만 더 가면 익숙한 풍경이 나올 거라고, 아버지가 있는 장소가 있을 거라고 믿으려 했다. 몇십 분이 지나고 나서야 그것이 크나큰 착각임을 깨달았다. 그제야 이상하다는 생각이 스쳤다. 이렇게 오래 걸었는데도 시간이 흐르지 않는 느낌. 이곳에는 밤과 낮이 존재하지 않았다. 시간이 멈춘 듯한 회색빛 하늘 아래에서, 하늘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혼자 남겨졌다는 감각,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는 불안감. 감정을 토하고 토한 끝에 가까스로 울음이 잦아들었고, 그제서야 그녀는 겨우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감정이 완전히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주저앉아 있어 봐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하늘은 곧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이때의 고하늘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여기가 ‘다른 세계’라는 것도, 그리고 이 순간이 기나긴 도피의 시작이 된다는 것도. ​

태양도 달도 보이지 않았지만, 어둡지 않았다.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나?-들은 그 밝기에 익숙한 듯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고, 상점도 열려 있었으며 거리에는 조곤거리는 목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지독하게 생기 없는 도시였다. 괴물에 대한 소문을 처음 들었을 때도, 하늘은 그것을 과장된 도시 괴담쯤으로 여겼다. 괴물은 경고 없이 나타나 굳은 인간들을 하나둘 잡아먹었다. 해가 지지 않는 이곳에선 어둠이 몰려온다는 전조조차 없었다. 마력 이상으로 태어난 괴물은 짐승과도, 인간과도 닮지 않은 기괴한 형체였다. 하늘만이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몸이 굳어버린 탓도 있었고, 어디로 도망쳐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손에는 상징과도 같은 목검이 들려 있었다. 검도 수련 때 늘 쥐던 그것. 이곳에 오기 전까지 가장 익숙했던 물건.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그저 가볍고 무력한 나무 조각에 불과했다. 목검으로 괴물을 처리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행동보다 늦게 따라왔다. 남아 있는 것은 비어 있는 공간과,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기척뿐이었다. 하늘은 뛰었다. 넘어졌고, 다시 일어났으며, 바닥을 구르며 방향도 없이 도망쳤다. 숨이 막혔고, 발목이 비틀렸으며, 팔에는 긁힌 상처가 늘어갔다. 괴물의 기척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멈추는 순간 끝이라는 감각이 등을 밀어붙였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세계에는 시간을 가늠할 기준이 없었으니까. 다만 어느 순간, 괴물의 기척이 희미해졌고 더 이상 소름돋게 따라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숨을 고르려 했지만, 호흡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괴물과의 첫 번째 조우 이후, 하늘은 이 세계가 단순히 위험한 곳이 아니라 무방비로 머물 수 없는 장소라는 사실을 체감했다. 목검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조차 엄청난 행운이었으니. 그날 이후 하늘은 거리의 상점과 노점들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고, 결국 값싼 철 검 하나를 손에 넣는다. 제대로 된 무기도 아니었고, 균형도 맞지 않았지만 적어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는 것보다는 낫다고 판단했다. 두 번째 괴물과의 조우는 첫 번째보다 훨씬 빠르게 찾아왔다. 이번에는 도망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하늘은 처음으로 진검을 들어 보았다. 검을 쥔 손은 떨렸고, 자세는 엉망이었지만 몸은 익힌 동작을 기억하고 있었다. 철의 무게도 어쩐지 가볍게 느껴졌다. 전투에서 하늘은 괴물을 완전히 처치하지는 못했으나, 유효타를 입히는 데 성공하며 스스로를 지켜낸다. 이 경험을 통해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행동이 먼저 나가야 한다는 단순무식한 진리를 깨닫는다. ​

그녀가 괴물을 상대했다는 사실은 빠르게 퍼졌다. 처음에는 경계였고, 그다음은 호기심이었다. 하늘은 이 세계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존재이자, 위험할 수 있는 존재였다. 하늘은 몇 번이나 도움을 요청받았다. 괴물이 나타날 때 함께 있어 달라는 부탁, 위험한 지역을 대신 지나가 달라는 요구. 음식이나 숙실 등의 대가를 약속하는 사람도 있었고, 아무렇지 않게 당연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고하늘은 거절하지 못했다. 그런 손길마저 사라진다면 정말로 죽을 것 같았으니까. 문제는, 괴물들이 고하늘에게 과민하게 반응했다는 점이었다. 마력 이상으로 태어난 존재들은 하늘의 위치를 이상할 정도로 정확히 감지했다. 전투가 잦아질수록, 사람들의 태도는 다시 바뀌었다. 도움을 주는 손길이 점점 줄어들었고, 하늘이 나타나면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괴물을 부르는 존재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 결정적인 사건은 작은 마을에서 벌어졌다. 하늘이 괴물을 하나 처리한 직후, 마을 한복판에서 또 다른 괴물이 출현한 것이다. 사람들은 이를 단순한 우연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소리쳤고, 누군가는 돌을 집어 던졌다. 두려움은 빠르게 의심으로, 의심은 곧 적의로 변했다. 고하늘은 변명하지 않았다. 해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을 뿐더러 그 상황이 지나치게 익숙했기 때문이다. 이유 없는 미움, 설명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낙인. 과거의 기억이 겹쳐지듯 스쳤다. 그녀는 선택해야 했다. 박대받더라도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혼자가 될 것인가. 서러움에 눈물이 흘렀지만, 그 순간 하늘은 처음으로 도망쳐야 한다고 느꼈다. 자신이 머무는 한 괴물은 계속 나타날 것이고, 그 책임은 모두에게서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직감. 결국에는 자신이 제거 대상이 될 것이라는 예감까지. 하늘은 그 직감을 무시하지 않았다. 짐이랄 것도 약간의 식량과 검이 전부였다. 작별할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하늘은 이름 없는 세계의 중심부를 떠나,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쪽으로 걸어갔다. 자신이 이미 어디에도 오래 머무를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하늘은 아직 알지 못했다.

도피 생활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간간히 보이는 마을을 제외하고는 온통 숲이었다. 몇 시간이 지나면 괴물이 나왔다. 도망친다는 표현조차 사치처럼 느껴질 만큼, 쫓기듯이 떠돌았다. 나무 아래에서 잠들고, 이슬과 흙냄새 속에서 눈을 떴다. 비가 오면 비를 맞았고, 바람이 불면 그대로 견뎠다. 불을 피울 줄도 몰랐고, 제대로 된 식사는 며칠에 한 번 있을까 말까였다. 이상하게도 허기는 심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감각이 무뎌진 것인지, 아니면 이 세계가 그런 식으로 사람을 마모시키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멈출 수는 없었다. 멈추는 순간 잡히거나, 발견되거나, 죽게 될 것이라는 감각이 늘 등에 달라붙어 있었다. 쉴 수 없다는 확신만이 고하늘을 움직이게 했다. 숲에서 내려와 처음 도착한 또 다른 마을에서, 하늘은 다시 한 번 희망을 품었다. 이번에는 조심했다. 먼저 나서지 않았고, 낮은 목소리로 길을 물었으며, 도움을 요청했다. 잠시나마 사람들은 평범하게 반응했다. 그러나 괴물이 나타났고, 하늘은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이제는 꽤나 능숙해진 몸놀림으로 괴물을 해치웠다. 안도의 표정은 빠르게 계산과 의심으로 바뀌었다. 그날 밤, 하늘은 마을 사람들에게 붙잡혔다. 명확한 죄목은 없었다. 위험할 것 같아서, 쓸모가 있어 보여서, 혹은 그저 낯설다는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쇠창살 너머에서 사람들의 대화를 들으며, 하늘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 세계에서 자신은 구해주는 쪽이 아니라, 언제든 버려질 수 있는 쪽이라는 사실을. 고하늘은 그토록 떠나고 싶어했던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감금에서 풀려난 것은 며칠 뒤였다. 쇠창살이 열렸고, 그녀 앞에 선 이는 전혀 위협적인 얼굴이 아니었다. 낮은 목소리, 부드러운 말투, 조심스럽게 내미는 손. “네가 이런 데에 있을 아이가 아닌데,..” 그 말 한마디에 하늘은 그동안 참고 있던 것들을 모두 쏟아냈다. 처음으로 보는 따스한 시선이었다. 울지 않으려 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그는 하늘을 집으로 데려가. 음식을 주고, 몸을 씻을 수 있는 곳도 마련해 주었다. 오랜만에 따뜻한 물이 피부에 닿자, 고하늘은 너무 오래 홀로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실감했다. 이 친절에 기대고 싶었다, 믿고 싶었다. 이 세계에도 아직 사람다운 사람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
그러나 그 온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며칠 뒤, 하늘은 우연히 들은 대화로 진실을 알게 된다. 자신이 머무는 곳이 단순한 숙소가 아니라는 것, 곧 다른 장소로 ‘넘겨질’ 예정이라는 것. 말 속에 섞인 단어들은 돌려 말하고 있었지만 의미는 명확했다. 보호가 아닌 거래. 살려주려는 것이었다는 해명은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친절은 애초부터 조건부였다. ​ 하늘은 또다시 도망쳤다. 이제는 도망이 아니라 원래 자리를 찾아가는 것만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뒤에서 불러오는 목소리는 끝까지 따라오지 않았다. 이미 값을 잃은 물건을 굳이 쫓을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늘은 점점 모든 선택이 자신을 괴롭히는 방향으로 이어진다고 느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하늘의 도피는 더욱 거칠어졌다. 괴물들은 여전히 끈질겼고, 사람들은 더 이상 피난처가 아니었다. 숲과 폐허, 마을과 마을 사이의 길은 모두 위험했고, 선택지마다 배신이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 번은 검을 제대로 쥘 틈도 없이 습격을 받아, 칼날이 손등을 관통했다. 피와 통증이 밀려왔지만, 그보다 먼저 떠오른 생각은 하나였다. 아, 또구나. 놀라움도 분노도 없이, 반복되는 불행에 대한 체념만이자리잡았다. 비 오는 날의 노숙은 일상이었고, 태풍이 치는 밤에도 하늘은 몸을 숨길 곳을 찾지 못했다. 옷은 젖었고, 체온은 떨어졌으며, 잠은 항상 얕았다. 눈을 감아도 꿈을 꾸지 않았다. 차라리 아름다운 환상이라도 보면 좋으련만. ​ 이상하게도, 가면 갈수록 괴물의 빈도는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었다. 하루를 넘기지 않고 조우하는 날도 있었고, 도망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기척이 겹쳐지는 경우도 있었다. 마치 하늘을 기준으로 무언가가 수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연이라고 넘기기엔 너무 집요했기에 그 감각은 점점 확신에 가까워졌다. 어김없이 유랑하던 어느 날, 숲의 깊숙한 곳에서 고하늘은 발걸음을 멈췄다. 바람 소리도, 괴물의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 있던 것은, 이 숲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구조물이었다.

돌과 금속이 뒤섞인 듯한 외형. 세월의 풍파로 마모된 표면에는 알 수 없는 문양이 겹겹이 새겨져 있었고, 구조물의 중심부로 이어지는 입구는 마치 오래전부터 열려 있던 것처럼 검게 벌어져 있었다. 인공적인데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만들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위화감이 공간 전체에 깔려 있었다. 이곳이 단순한 폐허나 유적이 아니라는 것쯤은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괴물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늘 따라붙던 압박감이, 구조물의 경계를 넘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대신 가슴 안쪽이 서늘해지는 감각이 들었다. 도망쳐야 한다는 본능과, 들어가야만 한다는 충동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하늘은 한참을 고민하다 검을 꽉 쥔 채 결국 발을 들였다. 어차피 숲으로 돌아가면 다시 쫓기게 될 것이고, 계속 떠돌다 보면 언젠가는 정말로 죽게 되리라. 그렇다면 차라리 후회를 없애는 게 나았다. ​ 미로는 일정한 규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아도 벽의 문양은 매번 달랐고, 방향 감각은 금세 혼탁해졌다. 무엇보다 이상했던 것은, 이곳에서는 괴물의 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대신 공간 자체가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였으며, 그 모습을 보다 보면 온 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몇 번이나 길을 잘못 들어 막다른 곳에 다다랐고, 몇 번이나 같은 장소로 돌아온 것 같다는 착각에 빠졌다. 그녀를 완전히 배척하지도, 쉽게 통과시키지도 않았다. 그녀가 견뎌 내는지, 포기하는지를 지켜보는 듯. 통증과 피로가 누적될수록 하늘의 판단은 단순해졌다. 계산하거나 고민할 여유는 없었다. 발이 향하는 쪽으로 움직였다. 미로의 중앙으로 들어갈수록 공포가 엄습했다. 공기가 차가워져 숨을 쉴 때마다 폐 안쪽이 서늘해지는 감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미로 내부의 수호체와 조우한다. ​ 완전한 괴물도, 제대로 된 생명체도 아닌 존재. 그러나 패턴이 규칙적이었고, 방어는 철저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것은 하늘을 죽이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몰아붙이며 한계를 시험하는 것에 가까웠다. 검은 이미 여러 번 금이 가 있었으나 정신만 차리면 공격은 피할 수 있었다. 더 이상 생각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살아야 한다는 생각만이 몸을 움직였다. 어떻게 움직이는지 스스로도 의아할 정도였다. 헛디딘 발목이 아려왔다. 이제 정말 죽겠다고 생각한 순간, 공간이 뒤바뀌었다. 고하늘이 서 있던 곳은 더 이상 통로가 아니라 방이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 놓여 있던 것은 유리처럼 투명한 날을 가진 장검이었다. ​

무질서도(無秩序刀).
네 글자가 검신에 박혀 있었다. 검을 향해 손을 뻗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의 전율이 신경을 타고 올라왔다. 아득해진 정신이 순식간에 돌아왔다. 조심히 검을 쥐자 투명하던 검날이 짙은 푸른색으로 물들었다. 개념조차 흐려지는 감각. 마치 이대로 휘두르라고 속삭이는 듯한, 위험한 확신.

 

05.

  • 루미아 아델라이데

구원자이자 동료. 벼랑 끝까지 몰린 상황에서 그녀를 구해낸 존재이며, 하늘이 다시 사람을 인식하고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만든 계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감정은 신뢰와는 결이 다르다. 그녀는 이름 없는 세계의 유랑 속에서 수없이 배신을 겪었고, 그 이후 타인에게 일정한 감정적 거리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그러나 그녀의 전투 능력, 정보력, 그리고 인외 존재로서의 특성은 세계를 유랑하는 데 있어 매우 효과적이기에 함께 다니고 있다.

 

06.

Will Stetson - Phony

I just can't see these simple things I can't keep

내가 가질 수 없는 간단한 것들을 도무지 볼 수가 없어요

What am I supposed to be?

나는 무엇이어야 하죠?

Shaken by the hand of night, it seems

밤의 손과 악수하는 것처럼 보이네요 ​

I just can't change the days I only feel pain

날들을 바꿀 수 없으니 나 고통만을 느껴요

I can't escape this wave of limitless rain

끝없는 비의 파도에서 빠져나갈 수 없어요

I would cry and weep without a bye as I grieve

나 안녕 없이 애도하며 눈물 흘리겠어요

 

07.

  • 쉴 수 있는 상황이 되면 가장 먼저 바닥 상태부터 확인한다. 돌인지 흙인지 나무인지에 따라 잠버릇이 달라지기 때문.
  • 세계를 이동한 이후로는 꿈을 거의 꾸지 않게 되었다. 잠을 자기만 하면 꿈을 꾸던 현실과는 대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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